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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재] 도내동 이석탄 장대비

작성자 : 고양문화원 날짜 : 23/06/25 21:58 조회 :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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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향토문화재 제39호

지정일 : 1999. 2. 1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48-1(전)

 

 

☆ 도내동의 유래

도내동은 임진왜란 때 이석탄 장군이 도내리 뒷산에서 아군이 많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군사 100여 명을 데리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산을 돌았다는 전설에서 도래울이라고 하다가 훗날 도내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신의 [李愼儀, 1551~1627]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향군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려는 데 대해 항소를 올렸다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형조참의·형조참판을 지냈다.《석탄문집》이 있다.

본관 전의(全義). 자 경칙(景則). 호 석탄(石灘). 시호 문정(文貞). 1582년(선조 15)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가 되고 1584년 참봉, 이어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군(鄕軍) 300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우고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이 되었다. 공조좌랑 ·고부군수(古阜郡守)를 거쳐 1604년 임천군수(林川郡守), 이어 남원부사(南原府使), 홍주(洪州) ·해주(海州)의 목사를 지냈다.

광해군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려는 데 대해 항소(抗疏)를 올렸다가 회령(會寧)에 유배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1627년(인조 5) 형조참의 ·형조참판을 역임했다. 같은 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수원에서 병사했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석탄문집(石灘文集)》이 있다.

 

 

도내동 흥도초등학교에서 창릉천으로 연결된 도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장대비이다. 현재 장대의 주위에는 다른 묘나 비는 보이지 않으며 산을 깎아 터를 만들어 잘 보존되어 있다. 장대비는 화강석으로 5㎝의 기단과 비신이 합쳐진 1기이며 옥개석과 비두는 만들지 않고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약간 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李石灘將臺’라 표기되어 있으면 뒷면에는 ‘先生壬辰起義兵設臺 後百四十九 年庚申 洞人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아 이 장대가 세워진 곳이 石灘 李愼儀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접전을 벌인 장소임을 알 수 있으며 1740년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석탄 이신의(1551~1627)는 高陽八賢의 한 분으로 본관은 전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