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혼례 역사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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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혼레의 역사와 의의

전통혼례의 역사

전통홍례 상차림

우리나라 혼례의 옛 역사를 유추할 수 있는 자료로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 고구려조(魏志東夷傳 高句麗조)를 보면 서옥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이는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여자의 부모에게 허락을 얻은 후 그대로 여자 집에 살다가 자녀를 낳고 아이가 자란 뒤에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자기(남자)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즉 남녀가 혼인하기로 합의를 보면 우선 남자가 여자의 부모에게 정중한 태도로 청혼을 하고, 여자의 부모가 흔인을 허락하면 남자는 장가를 들어 여자의 집에서 흔례식을 올리고 일정기간 동안을 머물렀던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고려말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중국송나라 학자인 주자(朱子)의 '가례(家禮)'가 당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와 같이 사례 즉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을 혼례의 이상형으로 논하는 예서들이 많이 저술되었고, 그 가운데 친영(親迎)의 시행에 대한 논란이 심하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자의 집에서 혼례를 올리는 중국의 혼례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특정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자집에 서혼례식을 올려왔고, 또한 혼례절차에 있어서도 가문과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면서 실제 관행상의 흔례는 당시 사회의 현실을 적용하는 예가 적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은 조선후기에 쓰여진'광례람(廣禮覽)'(1893년)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다.

전통혼례의 의의

전통혼례 신부

혼례의 의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저술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기(禮記)에는 '전지가 서로 합한 뒤에 인물이 나니 혼례는 만세의 시작'이라고 하였고,'내훈(內訓)'에서는 '혼례는 장차성이 다른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어울려서 위로는 종묘(宗廟)를 섬기고, 아래로는 후세에 자손을 맞이하는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편과 아내의 구별이 있은 뒤에야 아비와 아들이 정다움이 있고, 비와아들의 정다움이 있은 뒤에야 임금과 신하가 제 위치를 바로 잡게 되니 그러기에 혼례는 예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혼례라는 것은 혼인당사자에게는 일생일대에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의 하나가 되면서 가정적으로는 위로 조상을 섬기고, 아래로는 후손을 이어 호를 실천하고 화육(和育)을 위해 노력해 나갈 부부의 탄생과 새로운 가정의 형성이라는 의미있는 계기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