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의 충실한 문화지킴이 고양문화원
[전통민속제] 공양왕릉 봉행제
명 칭 :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 지정번호 : 사적 제191호 지정년월일 : 1970년 2월 28일 시 대 : 조선 태조3년(1394) 소재지 :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마을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이흥영 고양시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릉인 고릉(高陵)은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릉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34대 공양왕(恭讓王)과 순비(順妃) 노씨(盧氏)의 릉이다.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세워 창왕을 폐위시킨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옹립되었던 만큼 공양왕은 그들 앞에서 바로 보좌에 앉지도 못하였다는 평이 나돌 정도로 허위에 앉아 있었다. 제위 4년만에 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폐위되어 원주로 쫓겨났고 공양군으로 봉하여 간성군에 두었다가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져 조선 태조 3년 그곳에서 춘추 50세로 승하하였다. 그뒤 태종 16년 공양왕으로 추봉하고 봉릉하여 수호호를 두었다. 순비 노씨는 교하군인 창성군 진의 딸로 공양왕 원년 1월 순비가 되고 1남 3녀를 두었으나 나라가 망한 뒤 왕과 함께 쫓겨나 승하 후에 이곳에 묻혔다. 당시의 어수선한 시대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타 지역에서 공양왕릉이라고 주장하는 능이 제기되었으나 ‘고양’의 전설이 보다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인정되어 ‘고양시 원당동 왕릉골’의 공양왕릉이 1970년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공양왕릉제는 고양시 향토문화보존회에서 매년 10월에서 11월간에 날을 잡아 진행하고 있다. * 영산제(靈山齊) 영산(靈山)은 영축산의 준말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산이다. 수많은 보살들과 하늘 중생, 그리고 땅위의 많은 중생들이 회상에 모여 설법을 듣는 아름다운 모습을 재연시키려는 노력이 중국 당나라로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이 이르기까지 영산제로 전승되어 왔다. 온 세상 모든 성현과 수행자와 높은 스승을 청하여 봉양하며 법문을 듣고 시방의 외로운 혼령을 천도하고 무주고혼 영가들에게 장엄한 법식을 베풀어 극락왕생하도록 하는 의식이다. 제를 베풀 때는 먼저 도량을 장엄하는데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당시의 영산회상(靈山會相)을 상징화하여 법당 밖에 괘불을 모시고 의식 도중에 범패 등의 불교음악을 공양하여 장엄하게 진행한다. 불보살의 위신력을 빌어 조상의 업보를 씻게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대제의식(大齊儀式)이며 대사찰에서도 몇 년에 한 번 개최되는 행사로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모여 함께 장엄한 의식을 이끌어내는 행사이다. 영산작법은 커다란 괘불을 옮겨와 법좌에 모시고 향, 등, 꽃으로 공양하며 부처님을 찬탄하는 각종 염불이 범패스님들의 선율을 타고 울려퍼지는 가운데 불교의 사물(종, 법고, 운판, 목어) 중 취타와 호적에 맞추어 나비춤과 바라춤이 거행되어 장엄한 영산회상을 재현한다. 단의 구성은 법당처럼 상단(上壇)을 괘불 앞에 설치하고 향, 차, 꽃, 과일, 등불, 쌀 등으로 공양하고, 중단(中壇)은 신중단으로 장엄하고, 하단(下壇)은 그날 천도해드릴 영가들에게 제사드리는 영단으로 구성한다. 절차는 시련(侍輦: 불보살님과 도량을 옹호하는 여러 하늘과 팔부성현을 맞아 모심)에서 시작하여 의식단 앞에 이르고 잠시 정좌한 다음 각 단마다 권공(勸供)과 축원(祝願)을 하고 영단에 이르러 시식(施食: 법의 음식을 영가에게 베품)을 하고 회향하게 되는데 의식을 맡은 법주스님을 선두로 참가한 대중이 도량을 돌면서 회향한다. 이 의식은 자작자수(自作自修)라는 수행과 기원, 회향, 추선공양(追善供養)이라고 하는 교리발달과 함께 발전된 의식이며, 우리나라 전통음악과 무용이 함께 어우러져 있고 또한 민간신앙까지 수용한 불교의식이자 국가가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이다. * 초혼가 (무세중) 슬프도다, 슬프도다. 내 한 몸 죽어 한 인생 사라진다하더라도 한될게 없다마는 나라잃은 백성들의 한숨소리 뼈아프도다. 왕건 태조님의 삼한통일 고려대국이 내 대에 이르러 절단되니 오백년 왕조사가 하염없이 끝나도다. 오 슬프고 애달프도다. 내 어찌 공양에 이르러 끝이나고 말았는가! 20대 신종왕 6세손 정원 부원군과 부인왕씨 사이에 태어난게 1345년 이름은 요, 34대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였으니 춘추 45세로세. 유교를 숭상한다는 대신들 따라 주자가례를 시행하였으나 어찌하랴 공양의 운명이던가 난세의 현행이런가 이성계의 지략이 나라를 새로 세웠다하지만 고려 충신들은 계략에 말려 허무하게 고려대국을 종말케하였으니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갈라지며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매였도다. 오 슬프도다, 슬프도다. 고려대국의 찬란한 역사가 그렇게 끝나버리고 살육당한 원한이 사무쳐 떠도는데 이게 웬말이더냐! 후손들은 그 후 600년 동안 방치하였도다. 그 한이 시퍼렇도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는 철저하게 고려의 잔재를 외면하고 소멸시켜버렸도다. 역사의 어두운 무덤속에 갇혀 천도마저 못하신 공양왕과 순비노씨 영령이시여 이제 600년의 깊은 잠에 깨어나시어 밝은 2001년의 새 아침을 맞이 하소서 이제 세상은 당신 왕씨 조상님들을 받들어 뫼시는 시절이 다가와 있나이다. 三神 큰 조상님의 빛을 받으시옵소서 후천세계의 개벽의 문을 열고 나오시옵소서 저희 민족의 후손들은 그 내력을 잘 알고 있나이다. 저희 후손들은 그래서 당신 고려말 왕의 비운을 감싸드리고 진혼해드리어서 천도에 이르게 하고자하나이다. 현신하시옵소서 위령하고 진혼하려는 해원의 심정을 너그럽게 헤아려 받아주시어 환희의 얼굴로 저희 앞에 현신 하시옵소서 저희는 하늘의 뜻을 받아뫼시옵나이다.
2023/06/25, 고양문화원
[전통민속제] 효릉 봉향제
명 칭: 효릉(孝陵) 지정번호: 사적 제200호 지정년월일: 1970년 5월 26일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원당동 서삼릉에 위치 소유자: 국유 관리자: 문화재관리국 서삼릉 관리사무소 규 모: 65,970평 재 료: 화강암 및 토분 효릉(孝陵)은 조선 제12대 인종과 그 비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중종의 맏아들로 중종10년(1515) 2월 25일 탄생하였고 3월 2일 어머니 장경왕후를 여의었다. 중종15년 세자로 책봉되고 동39년 즉위하였으나 불과 재위 8개월 만에 31세로 승하하였다. 인품이 어질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생전에 복성군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었고 임종시에 부왕의 상을 마치지 못함을 송구히 여겨 부모의 릉(靖陵)에 묻히기를 유언하였다. 인성왕후는 나주박씨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중종 19년(1524) 11세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다. 선조 10년(1577) 6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효릉봉향제는 인종과 인성왕후의 제향을 실시하여 인종의 효심을 기리고 경로효행심을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매년 10월 둘째 주 수요일 12시, 고양시 원당동에 소재한 효릉(孝陵-西三陵)에서 효릉봉향회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며 고양시와 고양문화원에서 후원을 하고 있다.
[전통민속제] 행주서원제
명 칭: 행주서원(幸州書院) 지정번호: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1호 지정년월일 : 1985년 9월 20일 시 대: 조선시대 소재지: 행주외리 275 조선조 제24대 왕인 헌종이 고양군에 있는 서오릉에 거동하기 위해 행주산성 부근을 통과하던 중 임진왜란 때 공적이 높은 충장공 권율장군의 제향을 지낼 건물이 없음을 유감스럽게 여겨 왕명으로 교지를 내려 헌종 8년(1842)에 완공시킨 것이 바로 기공사(紀功祠)이다. 그러나 단순히 권율장군의 제향만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의 향반 ?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놓고 유학을 교습하게 함으로써 행주서원(杏洲 혹은 幸州書院)이라는 지방교육기관이 된 것이다. 이 행주서원은 대원군에 의한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의 모든 서원이 문을 닫았을 때에도 철폐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이유는 설립시기가 매우 늦은 까닭에 오래 전에 설립된 서원들처럼 여러 가지 악폐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러나 비록 서원철폐령에서 살아남았다고는 하더라도 근대교육이 우리나라에 도입되고 근대학교가 전국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자, 행주서원도 지방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정지한 채 다만 고양군내 유림들이 권율장군의 위업을 기리는 제향장으로서만 남게되었다. 일제하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내다가 해방이 된 후에는 한 해에 한 번, 양력으로 3월 14일에 제향을 올렸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성균관 유도회에서 ‘행주서원’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유림들이 중심이 된 행주서원제가 매해 음력 4월 15일과 9월 15일 봄, 가을로 거행되고 있으며 매월 음력 1일과 15일 분향을 올리고 있다. 또한 행주서원제와는 별도로 충장사에서 행해지고 있는 권율장군 승전기념제에는 고양군수가 초헌관이 되는 전군적인 행사가 됨으로써 단순히 권율장군 한 개인에 대한 추모행사가 아닌 전 시민들에게 전통적인 유교정신과 유학이념을 일깨워 주는 사회교육적인 행사가 되고 있다.
[전통민속제] 행주대첩제
매년 3월 14일 행주산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충장공 권율도원수의 행주대첩을 기념하기위한 제례행사로 행주대첩제를 개최하고 있다. 행주대첩제는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권율도원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충장사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이 제례에는 고양시장이 초헌관이 되어, 장군의 영혼을 불러들이기 위한 향을 피우고 술을 잔에 따라 모토 위에 붓는 강신례, 장군의 신위를 봉헌하는 헌폐, 제사에 사용한 술과 제물을 마시고 먹는 음복례, 그리고 망요례, 사신례(사당을 지키는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의 사방위신에게 절을 올리는 것) 등의 순으로 제례를 지내고 있다. 충장공 권율도원수에 대한 제례 이외에 고양문화원이 주관하는 행주문화제 행사에는 휘호대회, 승전음악회, 민속놀이 공연, 승전거리축제, 전통다례강좌, 승전기념 전국남녀궁도대회 등이 개최되어 지역민과 함께 승전의 기쁨을 나누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전통민속제] 용강서원 봉향제
일산서구 일산동에서 봉일천으로 향해 중산마을 끝 언덕 개미고개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서 논틀건너를 보면 북쪽으로 뻗은 산맥이 보이는데 이 산의 이름이 황룡산이다. 고봉산과 마주한 이 산줄기 삼태안 같은 아래 동네가 성석동 윗감내(상감천)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황룡산 밑 마을 중간에는 기와지붕을 한 전각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용강서원(龍江書院)이다. 이 서원은 본래 함경도 용릉강변에 있는 것인데, 6 ? 25에 의해 남북이 분단됨에 따라 서원에 제향을 할 수 없게 되자 안타깝게 생각한 박씨 문중과 당시 고양군의 유림에서 재건을 발의하고 모금하여, 군과 도의 지원을 받아서 1979년~1980년에 이곳에 다시 짓게 되었다. 이곳에 짓게 된 이유는 이곳에 제향을 모시는 분 중 박순(朴淳)의 부인 장흥 임씨가 박순선생이 함흥에 차사(差使)로 갔다가 죽음의 참변을 당하자 ‘지아비를 죽게한 박덕한 여인이 죽음으로써 지아비를 따름이 옳다.’고 하며 순절하니 태종이 열녀문과 더불어 묘를 쓸 산을 하사하였으니, 황룡산이 바로 그 땅이다. 그런 연유로 이곳에 용강서원을 재건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고려말 충신 충정공(忠靖公) 박서(朴犀)와 이조 영조때 문신 조상경(趙尙絅)과 이조 개국공신 함흥차사 박순(朴淳) 세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고 있다. 이곳의 제향은 해마다 음력 3월 16일과 9월 16일 두 번에 걸쳐 고양시 유림과 전국에서 초청된 유림이 올리고 있다. 이곳에서 제향을 받으시는 분들을 소개드린다. ▶충정공(忠靖公) 박서(박서) 충정은 시호로 고려 고종 때의 무신이다. 고종 18년(1231) 공이 서북면 병마사의 직책으로 구주의 성을 수호하고 있을 때, 위세를 떨치던 몽고군이 성으로 쳐들어와 이중 삼중의 포위을 치고 밤과 낮을 구별하지 않는 무차별공격을 퍼부었다. 공은 이런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지금의 게릴라식 전술로써 적군의 이동로를 급습하여 돌격전을 펼치고 누차(樓車)나 목상(木床)에 소가죽을 씌워 그 속에 군사를 숨겨 적의 눈을 교란하는 등 여러 가지 수법을 이용하여 적의 무리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에 몽고군은 빈번한 패전에 큰 피해를 입고 작전을 변경하여 급기야 진로를 개성으로 돌려 함락하고 고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고종을 협박하여 구주성의 항복을 명하도록 하였다. 이에 고종은 어쩔 수 없이 감찰어사 민희를 구주로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공은 완강히 거절하며 말을 듣지 않았다. 네 차례나 깨우치는 말을 했으나 듣지 않자 민희는 분하여 칼을 뽑아 자결하려 했다. 이에 공은 ‘어명을 어길 수 없어 항복 할 수 밖에 없습니다.’하고 눈물을 주르르 쏟으며 그제서야 항복하고 말았다 한다. 한편 몽고장수는 성을 둘러보며 감탄하기를 ‘내가 종군하여 70세가 되도록 천하의 성지와 전투하는 상황을 보았으나 이와 같이 훌륭히 하고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 성중의 모든 장수들은 뒷날 명장이나 재상이 되리라.’ 하였다. 과연 박서는 문하평장서(정2품의 벼슬)를 제수받았다. 선생의 의기와 의지와 위엄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충민공(忠愍公) 박순(朴淳) 공의 본관은 충북 음성으로, 시호는 충민이다. 이성계(이조 태조)의 부하로서 요동정벌 행차시 종군하였다. 고려군사가 압록강을 건넜을 때 심한 폭우로 물이 범람하게 되니 군사의 정황은 몹시 뒤숭숭하였다. 따라서 이성계는 천시의 순리가 합당하지 않으니 회군할 것을 개성의 조정에 품신하는 구실을 갖기에 이르렀다. 공을 신임하고 중히 여긴 이성계는 공으로 하여금 품신의 글을 가지고 조정(우왕)에 가게 하는 충복으로 삼았다. 이에 이씨 왕조가 개국하였을 때 태조 이성계는 공에 대한 능력인정과 신임으로 상장군의 직위를 내려준다. 한편, 방원이 형제의 난을 일으켜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결국 제 3대 임금 태종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고 보니 부친 태조에 대한 불효심과 더불어 왕으로서 행세를 할 수 있는 ‘옥쇄’도 부왕으로부터 받아야 할 사정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부왕의 환심을 사고자 하여 문안을 올리는 차사를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함흥으로 보내는 차사는 보내는 대로 황천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가를 모신 신하들이 태종의 조정을 원망하여 저지르는 참상이었다. 함흥에 차사로 가는 것은 곧 죽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니 소식이 없으면 ‘함흥차사’라는 은어가 생겨나게 될 지경이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함흥에 왕의 차사로 가는 것을 피하려 했다. 결국 어전회의가 열리고 모두들 왕과 눈길이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와중 늙은 대신 박순공이 그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태종으로 하여금 개국공신의 충성심에 다시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공은 임금에게 새끼 딸린 어미소와 함게 떠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공은 태조 처소로의 행차에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한 채 새끼딸린 어미소만을 데리고 이동하게 되었다. 태조의 처소로 가려면 ‘용흥강’을 건너야만 했는데 박순공은 송아지를 강가에 메어두고 어미소만 강을 건너게 하여 그 꼬리를 잡고 강을 건너갔다. 결국 평범한 농부의 모습으로 자신이 차사임을 감추게된 박순공은 무사히 태조의 처소에 도착하여 옛 막료를 만나 새삼 감회에 젖어 있는 태조에게 데리고온 어미소가 자식을 찾는 애틋한 울음소리를 들려주며 간곡히 상소하기를 ‘태상마마! 미물도 서로의 정감이 저러하거늘 태상마마와 저하의 애끓는 그리움이야 말 할 바가 아닐 줄 아옵니다. 태상마마! 저하께서는 태상마마에 대한 그리움 애끓는 줄 아옵니다. 환궁하심을 통촉하오소서...!’ 하며 복배하니 태조는 아련한 정감에 어려 ‘공은 빨리 가라’ 하였다. 그러나 공이 행장을 수습하여 용흥강변에 다다랐을 때에 신하들의 강력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보내어온 태조의 사자로 인하여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기 전 박순공은 태상마마께 도리를 다하게 해달라는 청을 하였는데 태조의 행재를 향해 4배를 올리며 ‘신은 죽거니와 다만 앞에 말씀하신 교시를 바꾸지 마시기를 원합니다.’하니 후에 이 말을 전해들은 태조는 ‘박순은 내가 젊었을 때의 어진 벗이다. 나는 전번의 말을 잊지 않겠노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그러나 태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박순공의 죽음을 윤허하면서 ‘만일 강을 건넜거든 절대 쫓지 말지어다’라는 조건을 덧붙임으로서 옛 벗에 대한 남다를 정을 내비쳤으며 촌각의 시간차로 운명을 달리한 박순공의 죽음에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 한편 부인 장흥 임씨는 고려 때 대사헌의 딸로서 공이 함흥으로 가던 날부터 밤낮으로 평안을 기구하였으나, 끝내 흉한 소식을 듣게되자 ‘지아비를 비명에 가시게 한 박덕한 여인이 살아서는 안되는 일이라, 내 남편의 뒤를 따르리라’하고 순절했다 한다. 후에 공과 장흥 임씨의 비보를 들은 태종은 충신과 열녀의 문을 세워 정표를 세우도록 명하고 공을 돈독히 추모하고 대대로 자손의 등용을 폐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한다. 그리고 부인에게 묘지를 주어 예를 다해 장례를 치루게 했으니 그 묘지가 지금의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윗감내)의 황룡산에 있다. ▶경헌(景獻) 조상경(趙尙絅) 본관은 풍양으로 숙종(1681)~영조(1746)때의 문신이다. 경헌은 시호이다.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종 36년에 문과에 급제를 한 후 성품이 정의롭고 강직하며 올곧은 마음으로 인해 온갖 모함과 무고로 귀양살이와 등용을 거듭하였으니, 경종~영조시대에 걸쳐 40여년의 조정생활에서 병조판서 4번, 이조판서 5번을 지냈다.